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주말아침 극장 조조데이트

korman 2013. 1. 9. 13:23

 

 

 

 

 주말아침 극장 조조데이트

 

내가 사는 아파트 옆 동에 사는 큰 아이네가 금요일 저녁 야간 데이트를 하고 오겠다고 손주들을 맞기고 나갔다 들어오더니만 극장표라고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저녁에 둘이 나가더니 영화를 보고 들어 온 모양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타워”라는 영화인데 가족이 같이 볼만한 영화이고 나이 먹은 분들도 많이 오는 것 같아 토요일 오전에 영화 보면서 어미, 아비 데이트나 하라고 하였다.

 

참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3년 정도 지났을까? 내가 몹시도 좋아했던 ‘아바’의 유명한 음악들이 영화 내내 채워지는 아름다운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를 보고 나오면서 동행한 마누라에게 “화면과 음악은 좋았지만 친아버지가 누군가도 모르고 아버지 후보가 3명이나 되는 딸이 아무리 서양이라도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정서로는 참 난처한 영화구만.” 하고 소감을 건넸던 기억이 난다.

 

‘타워’라는 영화가 TV에 소개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심 70 몇 년도에 보았던 미국영화 ‘타워링’을 떠 올리며 소개되는 장면과 내용이 참 많이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옛 영화를 재제작하는 권한을 사와 지금의 감각으로 각색하여 만들고 있으니 이 영화도 그리 하였다면 줄거리나 배우들의 위치가 닮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큰 아이네가 옛것과 새것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권한을 사 와 재제작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인터넷도 뒤져보았지만, 접하지 못하였으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런 나의 물음에 단지 ‘타워링’이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큰아이의 개인 의견만 있었을 뿐이었다.

 

중학생 또래 녀석들이 내 뒤에 앉아 재잘대는 걸 들으며 이 녀석들이 영화가 진행되면 좀 조용히 하여 주겠지 하고 바랄 즈음 화면에 나타난 초고층 유리 쌍둥이 빌딩에서 말레이시아 콸라룸프르의 쌍둥이 빌딩,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참 많이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건물을 있는 구름다리 모양까지도. 건물의 발화 원인이 바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건물주가 동원한 헬리콥터 이벤트 때문이었다는 착상은 좋았지만 그 동원된 헬리콥터가 힘 좋은 건물주의 전화 한통화로 이루어진 공공 헬리콥터로 설정된 것은 참 씁쓸한 뒷맛을 남겨주었다. 영화는 발전된 기술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박진감이 더 하였고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였지만 편집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박진감에 무게를 두다 보니 그리 되었는지 좀 갸우뚱해지는 장면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 소방대원들의 헌신과 노력과 희생은 때 마침 연말의 화재 진압을 하다 쓰러진 소방관들의 영결식 장면과 맞물려 진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같은 소재를 다루는 재난영화의 스토리 진행이 뭐 크게 다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타워링’이라는 영화를 너무 의식하고 간 탓이었을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감동의 뒷전에서 떠나지 않는 비슷한 설정들이 영화의 뒷맛을 오래 남겨두지 않았다. 모티브가 뭐였냐를 떠나 유사한 제목, 같은 주상복합유리빌딩, 파티가 불씨를 제공하는 설정, 부실공사로 작동되지 않는 스프링클러, 스티브 맥퀸과 폴 뉴먼이 설경구와 김상경으로 바뀌었을 뿐 같은 형식, 핑계는 달랐지만 80여층에 있는 물탱크의 물이 화재 진압에 최종적으로 이용되는 장면, 인명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악덕 건물주, 사내 연애, 노인들의 로맨스 등등., 그러나 ‘타워링'과 유사한 장면들은 스토리 진행상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타워'에 대한 섭섭함은, 관객들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영화가 주인공을 살려서 영웅을 만드는데 비하여 우리 영화는 왜 늘 죽여서 영웅을 만드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티브 맥퀸은 건물 옥상에 있는 거대한 물탱크를 폭파해 그 물을 진화에 이용하려고 폴 뉴먼과 함께 타이머가 달린 폭발물을 설치하여 자신이 대피 할 시간을 마련하고는 물살에 쓸려 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후 폭발하게 함으로써 살아남아 영웅이 된다. 이건 1970년대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2012년의 설경구는 단지 리모컨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첨단 시설이 다 동원된 건물에서 1960년대 멜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런데 그가 리모컨을 잃었다고 몸으로 폭발물을 터뜨렸냐 하면 그게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가 폭발물에 직접 다가가 터뜨리는 게 아니라 폭발물이 설치된 탱크에서 떨어져 스위치로 터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폭발물과 스위치 사이에 연결선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또한 연결선의 길이를 조정하여 설경구가 살 수 있는 거리를 조성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렇다면, 지문인식기를 통해서만이 출입이 가능한 첨단빌딩에서, 거기에 왜 유치장 쇠창살이 갑자기 등장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감옥 같은 창살을 닫고 자신을 희생하는 원시적 멜로 보다는, 그로 인하여 오열하는 설경구 부인의 모습을 엔딩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스티브 맥퀸처럼 물에 휩쓸리며 살아남아 지휘본부에서 일반인 보다는 정치인을 먼저 구하라고 명령하던 그 높으신 양반의 턱주가리를 한번 갈기는 장면을 엔딩으로 하였다면 더욱 시원하고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기왕 소방관들의 헌신과 희생을 그리려 하였다면 영화 도입부에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모든 소방관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문구를 더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마추어적 아쉬움으로 극장 문을 나섰다.

 

2013년 1월 7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