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성묫길에서

korman 2014. 9. 14. 15:07

 

 

 

성묫길에서

 

큰길에서 묘원에 들어가는 입구 작은 길에 작년보다도 일찍 도착하였는데 차들이 줄지어 있다. 벌써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들도 큰길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늘어서 있다. 작년에는 이 시각에 묘원에서 나오는 차들은 거의 없었고 또 들어가는 차들로 인하여 길이 이렇게 막히지도 않았었다. 입구에서 10분이면 도착해야 할 산소에 1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나중에 신문을 보니 올해는 예년에 보다 성묘객이 30~40%는 늘었다는 기사가 났다. 세월호등의 여파로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해 졌다는 분석을 내 놓았다.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추석 전에 성묘를 다녀오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대체휴일 등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 추석 당일에 다녀온 이유가 더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산소에서의 느낌에는 평소의 10배쯤은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돌아오는 길도 만만하지 않아 가까운 천안인데도 아침 7시에 떠난 길에 12시간이 지나고서야 집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생전에 내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고향에서 성묘 가시던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말씀 중에 늘 빼지 않았던 말씀이 성묘 가는 사람들로 “산이 하얗었다” 였다. 당시에는 성묘 갈 때 하얀색의 옷을 차려 입었는지 아니면 다른 색 옷이 별로 없던 시절이니 하얀 옷이 많았었는지 모르겠지만, 하기야 지금도 예의를 차리려 한다면 하얀 옷이나 검은 옷을 입어야 하겠지만, 늘 그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묘소에 다 울긋불긋한 조화들이 꽂혀있고 성묘객들도 대부분 색 있는 옷을 입고오니 산이 하얗다기 보다는 총천연색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성묘를 가면 그 말씀이 늘 생각난다. 한편 좀 어색한 것도 있다. 요새 묘원이라는 데가 1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다른 분이 모셔져 있다. 그렇다 보니 한 쪽에서는 절하고 한 쪽에서는 목탁치고 한 쪽에서는 찬송가 부르고 하는 각 집안의 서로 다른 행사들이 같은 즈음에 이루어 질 때가 있다. 이런 때 찾아오는 어색함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이번 성묘에서는 누군가가 묘소에 바치는 “사모곡” 색소폰 연주가 주위의 어색함을 덜게 하였다.

 

길이 막히면 운전하는 사람은 참 피곤하다. 다리를 액셀과 브레이크로 계속 옮겨야 하는 것도 피곤하지만 (수동은 왼쪽 다리에 마비가 온다) 졸음이 온다는 게 더 괴롭다. 졸음은 같은 차에 탄 식구들에게 먼저 찾아와 잠들게 한다. 그렇게 편히 자는 모습은 운전자에게는 참 고욕이다. 핸들 잡은 사람의 눈꺼풀을 더욱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운전하면서 계속 하품을 하고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옆자리에서 운전하는 사람의 행동을 보면 대충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빨리 핸들을 바꿔 잡아야 한다. 그래서 조름도 쫓고 지루함도 이기고 아들과의 운전도 교대할 겸 휴게소에 들르자 한숨 자고난 손녀들이 아이스크림을 찾으며 다시 재잘대기 시작하였다. 휴게소에 들를 때 까지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그냥 그대로 집에까지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휴게소를 나서는데 큰손녀가 운전하는 할아비를 부른다. 아!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나.

 

“할아버지 그런데 어~어~ 죽으면 왜 땅속에 들어가요?

노할머니, 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땅속에 계시다는 할아비 소개에 돌아가셨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 죽었다는 말이라고 하였더니 이어 할아비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녀석이 작년 추석 성묫길에는 땅속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겨울에 추우시겠다고 다음에는 담요를 가져다 덮어드리자고 하였었다. 그 때도 왜 땅속에 계시냐고 계속 묻다가 더듬대는 할아비 대답에 못 견뎠는지 “아! 땅속이 집이니까 거기 계시는구나.”하는 자의적 해석을 내리고는 질문을 멈추었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죽음’의 의미를 좀 알았는지 죽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집에 도착 할 때까지 졸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에 대한 답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나는 “할아비 운전해야 하니까 할머니에게 여쭈어봐라.” 하고는 얼른 말꼬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녀석이 일전에는 아기는 어디로 나오냐는 문제를 가지고 집요하게 할아비를 괴롭히더니 며칠 전에는 TV에서 나오는 중세의 화장장면을 보고 왜 사람이 뜨거운 불 위에 누워있느냐고 물어 또 할아비를 고역스럽게 만들었었다. 계속되는 손녀의 철학적인 질문에 쩔쩔매는 할머니의 모습에 지루하고 졸릴 새도 없이 집에 도착하였지만 이제는 손주들을 위하여 주머니에 사탕값 챙겨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아비 노릇 제대로 하려면 깊이 있는 철학 공부도 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죽음과 연관된 손녀의 질문에 내가 땅에 들어갈 때 까지도 답을 구하지 못할 것 같아 아들과 나눈 저녁소주잔에 소주 대신에 손녀의 질문이 계속 부어지는 것 같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2014년 9월 14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