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두루마리에 묶여있던 기억

korman 2014. 11. 30. 20:15

 

 

두루마리에 묶여있던 기억

 

밤새 비가내리더니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층층으로 회색과 흰색 구름의 계단을 지으며 아침을 열었다. 창문 곁에 서서 내려다 본 사거리 코너에 아직 빗물이 고여 있는데 그곳에 우뚝 솟은 은행나무는 벌써 마지막 잎새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완전한 나신으로 뾰족이 치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책장 옆구리로 삐죽이 나와 있는 비닐 쇼핑백이 보였다. 뭐 특별한 것이 없으니 지금껏 무관심하였는데 눈에 거슬려 속으로 밀어 넣으려다 보니 예전 왕에게 올리던 상소문 모양새를 한 둥근 종이다발이 보여 열어보았다. 순간 몇 년을 잊고 있었던 기억이 그 두루마리 속에 묶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지금은 마주할 수 없는 옛 술친구가 내 옆에 놓고 간 그의 흔적이었다.

 

나 보다 15년 연배였다. 마나님을 앞세우고 만난 자리에서 “(웅급실)가더니 안 왔어”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평소에는 두세 번 나누어 마시던 소주잔을 한 번에 들이키시더니 담배도 피지 않았던 분이 몇 년 지나지 않아 본인도 폐암으로 떠나셨다. 마나님 없는 시간의 무료함 때문이었는지 그 나이에 동네 복지관에 다니며 컴퓨터를 배우고 있노라 하셨다. 그리고 몇 달 후 소주한잔 하자 하더니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가까운 사람에게만 주는 마음의 선물, 족자라 하였다.

 

말아 놓은 위아래의 환봉을 펼쳤다. 글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순간 믿지 못할 작품이 거기에 있었다. 독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우리나라 지도가 애국가를 한자로 하여 그려져 있었다.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워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걸 프린트하고 본인의 낙관을 찍고 족자를 만들어 컴퓨터 배우고 처음 작품이라며 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집에 가져와 나중에 걸 데를 찾아보지 하고 비닐봉지에 담아 책장 옆에 넣어두고는 잊고 있었는데 새집으로 이사 와서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이제야 눈에 뜨여 생각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그 분이 떠나신 지도 3년이 흘렀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합작인 족자를 꺼내 펼쳐들고 내 개인 살림살이가 놓여있는 방의 창문과 마주보는 빈 벽에 걸었다. 때마침 잠깐 구름층 사이를 뚫고 나와 남쪽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족자에 닿았다. 이제야 빛을 보는 자신의 작품에 자축을 하였을까 아니면 잊고 있었던 나의 무관심에 대한 섭섭함, 그러나 늦게라도 기억해준 나에 대한 인사였을까. 잠시 비추어진 햇살에 그의 얼굴이 오버랩 되며 소주 한 잔에 담겼던 그의 말이 되뇌어진다. “가더니 안 왔어.” 나이 드신 내 술친구도 족자를 주고 그렇게 가더니 다시는 술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에도 구름은 멀리가지 않고 머물러 내일 아침에는 눈을 뿌린다고 한다. 이 저녁 족자위에 떠오르는 그의 얼굴과 소주 한 잔은 내일 눈 속에도 계속 되려나.

 

2014년 11월 30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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