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버킷리스트

korman 2015. 2. 8. 10:54

 

 

 

버킷리스트

 

2007년에 만들어진 ‘버킷리스트’라는 영화를 차분히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다 보았다. 케이블TV에서 토막으로 본 것까지 이어 놓으면 한 너댓 번은 보았음직한 영화지만 우리영화 ‘님아 그 강을....‘와 ’국제시장’을 보고 난 후 문득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마 지나온 세월에 내 버킷리스트에는 무엇이 담겼었는지 또 앞으로 남은 세월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생각을 좀 정리해 보고자 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개봉되기 이전에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그리 유행하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우리나라 말은 유행하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사실 각자의 살아가는 모양새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버킷리스트에 담고 싶은 것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단지 몇 개가 되었건 그걸 실천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저 마음속으로만 새겨야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해 보면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그저 각자의 희망사항이고 보면 틀어놓은 수돗물 아래 놓인 물그릇에 물이 담기고 넘치듯 희망의 버킷에 담겼다가 흘러버리고 또 담기고 하는 것들이 아닌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인생이라는 큰 그릇에 담겨진, 어찌 보면 각자의 살아가는 희망과 철학과 목표가 되겠지만 그 어원을 들여다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절박하게 뱉어야 했던 한마디였음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가 아니라 차라리 ‘생의 마지막 한마디’라 하여야 더 의미가 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목에는 밧줄을 두르고 버킷위에 올라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인간적인 그러나 가장 짧은 시간의 한마디. 그 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킷은 집행관의 발에 차여지고 죄수의 외침은 허공에 뿌려진다. 세월의 아이러니인지 우리는 지금 중세의 그 서양 죄수들의 마지막 디딤이었던 버킷에 멀쩡한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을 담겠다고 야단들이다.

 

기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버킷리스트는 거의 모두가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들 인고로 정비공 ‘카터’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재벌 ‘에드워드’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터는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는 동안 에드워드가 상실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에드워드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에게 그것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리스트 중에서 맨 마지막, 죽으면 한줌 재가 되어 전망이 좋은 히말라야 산봉우리에 묻히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비록 두 사람 다 남의 손을 빌리긴 하였지만,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버킷리스트는 모두의 그것과는 다르다. 나는 아직 나의 남은 생애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리스트에 넣어야 실천이 가능한 것인지 아직 고민 중이라는 대답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는 영화 속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가족과 늘 함께하여야 한다는 것과 전망 좋은 곳에 가루가 되어 묻히고 싶다는 것.

 

이번 설 연휴에는 아들과 사위와 이슬 한 잔에 젖으며 버킷리스트를 화제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내 버킷에 마지막으로 담겨질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바다가 보이는 산등성에, 가능하면 소나무 한 그루 아래 재가 되어 오래도록 바다와 파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름이 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그 소나무에 걸릴 조그마한 비목의 몇 줄 사연은 이제부터 내가 수차례 쓰고 지웠다 또 고쳐 써야 하는 내 인생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 버킷은 비워지겠지.

 

2015년 2월 7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