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가을이 없어지면 안 되는데

korman 2016. 9. 25. 12:01



       그림:구글


가을이 없어지면 안 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피를 내리는 일이다. 커피 이야기가 나오면 늘 빠뜨리지 않고 재탕 삼탕 하는 말이지만 내가 주장하는 커피가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날은 갈색 낙엽위에 첫 서리가 내린 날 아침이다. 여명속이면 더욱 좋다. 낙엽 태우는 냄새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기온이 많이 내려간 요즈음 새벽에 창문을 열고 아침노을에 물든 하늘가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맛이 참 좋다.


요새 어디에서건 책이나 신문을 읽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한 열흘 전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서 2명이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로 커피잔을 들고 새벽거리를 바라보며 전화기에 뜬 간밤의 이메일을 읽다 문득 나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잠시 접어두고 무언가 종이에 쓰인 것을 읽어야 하겠다는 의무감이 생겨나 책장 문을 열었다. 책장이라곤 하지만 읽을거리 보다는 잡동사니들이 더 많이 들어있으니 꽂힌 책이라야 몇 권 안 되지만 그러나 그게 거의가 산문집이나 여행기다 보니 다시 읽어도 새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면 교과서도 아닌데 뭘 읽은 걸 또 읽겠어하는 건방진 마음이 들어 책을 고르는 흉내만 내다 책장을 닫았다. 이 가을에 이거 한권은 읽어야겠다고 며칠 전 보아놓은 책이 있어서였다.


커피 한 잔 놓고 아침 신문의 지면을 들추던 재미가 쏠쏠하였는데 인터넷으로 모든 신문 검색이 가능하니 오랫동안 보아오던 종이신문 끊고, 움직이는 동안에도 스마트폰으로 많은 것을 읽어 들일 수 있으니 종이책 끊고, 그렇게 지내왔지만 디지털에 침침해지는 눈을 생각하며 늘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날로그 감성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책장을 바라보는 횟수가 늘어가기는 하였다. 어쩌다 서울 나들이 할 때는 전철에서 읽어야겠다고 한 권 책을 골라 놓고는 그것만 들고 다니기가 귀찮다는 생각에 다시 넣어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여 왔다. 아마도 애타게 종이책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기도 하였겠지만 들고 다니기 귀찮다는 핑계로 주머니속 스마트폰의 저력에 아날로그 지성이 늘 밀려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배달되었다. 김형석 교수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이다. 이 분 연세가 올해 97세라 하는데 아직 정정하게 활동을 하신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친구가 카페에 올린 한 편 에세이를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것인데, 학창시절 가장 심취하였던 책이 이 분의 산문집이기는 하였으나 아직 이리 창작활동을 하실 거라는 생각은 잊고 있었다. 70 이전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는데 97세가 되신 분은 인생을 어찌 이야기 하고 계시나 궁금한 마음에 책방에 들러 책을 확인하고는 인터넷서점에 주문을 하였다. 서점에 들른 김에 책을 바로 사지 않은 이유는 책방에서 스마트폰으로 그 책의 온라인값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기계의 지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날로그의 감성을 다시 일으키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디지털의 힘을 빌린 셈이다.


주말 친구들과의 모임으로 서울을 왕복하며 한 절반정도는 읽었지만 아직 인생이 뭐라는 경론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석 교수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인생을 이야기 하고자 했을 테지만 이 무지한 독자는 수학의 공식처럼, 아니면 간단한 삼단 논법으로 “고로 인생은 무엇이다”라는 결론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로 향하는 전철에서도, 돌아오는 길에서도 역시나 손바닥을 들여다 보며 고개 숙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봄,여름 내내 눈에 뜨이지 않던 책읽는 모습의 사람들이 가을이라는 계절 때문인지 몇몇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심취되었던 디지털 기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손바닥에 고개를 숙이는 것 보다는 그래도 무릎위에 놓인 책 한 권에 숙여있는 고개가 더 좋아보였다.


여름이 지나고 비가 내리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자 며느리가 “아버님, 가을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하자 곁에 있던 작은 손주가 놀라는 표정으로 갑자기 “가을 없어지면 안 되는데”라 소리 질렀다. 왜냐고 물으니 “내 생일이 가을에 있는데 가을이 없어지면 내 생일이 없어지잖아요.” 그 녀석 생일은 가수 이용이가 하루 벌어 일 년을 먹는다는 ‘잊혀진 계절’, 10월의 마지막 날 이기 때문이다. 모든 식구들이 함께 웃었다. 이런 것이 인생 아닐까 이 가을 문턱에서 느껴본다. 이래서 가을은 나에게도 존재하여야 한다. 사계절 중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가을이기는 해도.......


2016년 9월 24일

하늘빛



음악: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