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용서

korman 2006. 12. 16. 00:07

조선범종 강화동종, 보물 제11호

사찰의 종이 아니라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 달라이라마의 용서“ 중에서 -


며칠 전 딸아이가 달라이라마가 쓴 “용서”라는 책을 사다 주었다. 얼마 전에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을 읽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가 쓴 책을 사온 것 같다.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오래 전 절친한 친구와 “용서”에 대하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논쟁을 벌리던 생각이 났다. 그는 그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지금 그는 장로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렇지만,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있음으로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모두 사하여 주신다고 역설을 하였다. 그때 내가 물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내가 어떤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여 그 사람이나 그 가족이 현재 나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거나 돌이킬 수 없이 불행해 졌다면, 그리고 그 당사자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종교적인 용서만으로 자기 스스로 용서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용서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종교적인 용서란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라고 역설 하였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이런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친구는 요새도 가끔씩 나에게 종교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통제하는 것은 종교 이전에 상식과 윤리와 도덕에 입각한 생활을 하는 것이지 종교에 기대어 나 스스로를 통제할 생각이 없네” 라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고 나는 그의 하나님을 계속 조물주라 부른다. 한달에 한번은 그와 소줏잔을 기울이며....


서두에 소개한 달라이라마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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